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갑옷 (문단 편집) == 발달 과정 == [[일본]]에서도 [[선사 시대]]에 해당하는 [[야요이 시대]]부터 갑옷이 있었다. 가죽제를 비롯한 다양한 갑옷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유기질이므로 유물은 남은 바가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갑이 현존하며, 이 형태가 고분 시대의 단갑(短甲)과 유사하여 단갑의 스타일의 원조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양식, 또는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류에 의한 영향으로 추정된다. 야마토 정권이 일본의 주도권을 잡고 세력을 확대해 간 [[고분 시대]]에는 단갑(短甲)과 괘갑(掛甲)이라는 갑옷이 주류를 이루었다. 단갑은 일본과 초기 [[백제]], [[신라]], [[가야]]에서 공유하고 있던 것으로 철판의 연결 방식과 패턴에 따라 종장판갑, 횡장판갑 등으로 구분한다.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반도 국가였던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게 유력하다.[* 야마토 정권 이후인 아스카 시대를 연 쇼토쿠 태자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 단갑은 철판을 리벳으로 연결하여 몸에 맞게 제조한 철판갑옷, 즉 라미나 아머(Laminar Armour)로써, 기본적으로 몸통만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어깨와 다리를 방어하는 부품들도 등장한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 지방에서 [[사무라이]]들이 크게 세력을 늘리고, 중앙 정치에도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확인되는 갑옷이 바로 오오요로이(大鎧)이며, 일본 갑옷 하면 바로 떠올리는 바로 그 모양새이다. 투구의 커다란 V자 장식, 얼굴 옆부분의 커다란 판, 사각형의 거대한 어깨 보호구, 형형색색의 화려한 실로 엮은 외장에 이르기까지 이후 1000년간의 일본 갑옷의 기원은 직접적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무사들이 말을 타고 원거리에서부터 활을 쏘며 접근하여 근거리 저격전으로 들어가는 전투 양상이었고, 오오요로이는 화살에 대비하여 크게 펑퍼짐하고 갑옷과 신체 사이에 넉넉한 공간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하급무사들의 갑옷으로는 도마루(胴丸)가 있었는데, 걷기 편하게 만들어졌고 이때에는 투구 말고는 다른 부속품이 따로 없었다. [[가마쿠라 막부]]시대까지는 [[오오요로이]]가 대세를 타고 있었지만 몽골침공 이후 벌어진 사회 혼란속에서 대두된 악당(惡黨)이라는 신흥 무장세력과 그들의 새로운 전투 방식은 더이상 고리타분하고 의식화된 마상 활쏘기 전투가 아닌 산악에서 매복하고 기습하며 지형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투 방식이었고, 전쟁의 형태 자체가 바뀌어갔다. 그래서 몸에 딱 붙고 도보전투가 간편한 도마루가 정규 장비로 격상되어 투구를 비롯한 다양한 부속품이 붙어 풀 슈트의 제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서 [[겐무 신정]],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에 이르는 수십년간의 내전기간 중 완전히 정착되며, 간이 장비로 여겨졌던 하라마키(腹卷)까지 가볍고 활동이 편하다는 점 때문에 정규 장비로 격상되게 된다. 또 이 내전기간 동안 방어가 부실했던 무릎과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하이다테(佩盾)가 등장하고, 왼팔에만 차던 팔 보호구인 코테(籠手)를 양팔에 모두 차게 되는 등, 일본갑옷의 방어 범위와 방어력이 크게 향상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이러한 갑옷의 강화와 중장화에 따라 백병전용 무기가 크게 흥하였고, [[금쇄봉]]이나 가리봉같은 타격무기, [[오오타치]], [[나가마키]], [[창(무기)|창]] 같은 신무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창은 헤이안시대까지 모(矛)라는 이름으로 쓰였으나, 이때에는 방패를 들고 한손으로 잡고 찌르는 무기였다. 이런 무기는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에 비해 전투의 융통성과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여 쉽게 제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모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헤이안 후기부터 남북조시대까지 도보 백병전 무기의 1번은 단연 검과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였다. 일본에서 창(야리:槍)이란 두손으로 잡고 쓰는 것을 호칭하며, 이 시대의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논픽션 군대소설. 황당한 소설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많아 연구의 주요 자료가 된다.)에 창이라는 단어가 등장함으로써 난보쿠초 시대 전쯤에 재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와 [[센고쿠 시대]]에 당세구족(토오세이구소쿠, 当世具足)이라는 양식이 등장한다. 당세구족이란 요즘 시대의 갑옷이라는 뜻인데, 그 양식이 굉장히 다양해서 그 특징을 한 번에 말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주요한 변화는 소찰을 엮어 만들고, 그 실도 굉장히 촘촘하게 엮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큰 철판을 사용해 갑옷을 만들고, 실도 꼭 필요한 만큼만 듬성듬성 엮어서 기존의 갑옷에 비하면 화려함이 덜하지만, 실용성은 매우 좋고 양산하기 편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이 점은 현대 재현 갑옷에서도 동일해서 소찰을 엮어 만드는 고전 갑옷은 그 가격이 수백~수천만 원이지만, 당세구족은 싼 것은 수십만 원 선에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크게 보급된 총기류에 대한 방어를 신경 썼다는 점도 특징이다. 유럽제 판금 흉갑과 투구([[콩키스타도르|모리용 투구]])를 수입해서 일본식으로 개조해서 쓰기도 했으며,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유럽제 판금 흉갑을 남만동(南蠻胴)이라고 불렀고, 차후 일본인의 체형에 맞추어 국산화시키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갑옷이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갑옷도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써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당세구족보다는 과거의 오오요로이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훗날 초기의 일본 사극에서 배경이 전국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오요로이가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조차 일본군의 갑옷이 오오요로이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치 조선 후기에 의장용 갑옷으로 두석린갑이 생겨난 영향으로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 조선군 갑옷이 두석린갑으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진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에도 시대 초중기까지는 당세구족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다. 막부 말의 혼란기에 다시 갑옷이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갑옷은 과거의 당세구족이 아니라, 쇠사슬로 짠 쿠사리 카타비라로써, 옷 밑에 받쳐입어 칼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접이식 간이 투구나 가죽제 방어구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갑옷 착용은 유신세력과의 갈등이 내전으로 비화되면서 더 이상 최신예 유럽식 소총과 대포앞에서는 갑옷이 실전에서 의미있는 방어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등 투구에 쓰인 면갑도 쓰였는데 [[카부토]]에 달린 가면도 면갑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면구]]라고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